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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동학농민운동>

by 로너's 2015. 8. 25.

- 요약 -

1.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이 갖은 명목을 내세워 농민들 엄청나게 착취함.

2. 당시 지식인이었던 전창혁 (전봉준 아버지) 이 항의문서를 제출했지만 도리어 고역을 당함.

3. 빡치 농민들이 고부성 부셔버리고 조병갑 죽인다고 들고 일어남.

4. 겁먹은 정부에서 해산하면 다 들어준다고 뻥치고 해산하니까 주동자들 잡아다 족침.

5. 더 빡친 농민들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중심으로 '보국안민', '제폭구민' 을 외치며 봉기를 일으키고 일반백성들까지 합류.
(보국안민 :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 제폭구민 :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

6. 당할대로 당해서 독이 오른 동학농민군, 이를 우습게 보는 관군과 황토현에서 전투가 일어남.

7. 상대적 열세인 동학농민군에게 관군이 개박살나고 이후 진주성까지 동학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점령해 버림.

8. 결국 정부에서 동학농민군과 협상을 벌임. 
(농민자치기구 집강소 설치를 합의.)

9. 이 협상안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혁명적인 내용임.
(탐관오리 엄징, 청춘과부 재가 허락, 노비문서 소각, 토지 평균 분작 등.)

10. 자기들 힘으로 안될것 같으니 명성황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에 파견됨.
(포장된 드라마나 뮤지컬과는 달리 당시 명성황후와 민씨 일가의 사리사욕과 비리는 실로 엄청났음.)

11. 일본군은 경복궁의 점령하고 고종을 인질로 잡고 조선땅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킴.

12. 이를 목격한 동학농민군들은 이후 '척양척왜' 를 외치며 일본군과 싸우는 2차 봉기를 일으킴.
(동학농민군들의 '반봉건'은 제도나 탐관오리가 대상이었지 왕권에 대한 도전까지는 아니었음.)

13. 애초에 조선침략의 야욕을 품고 있었던 일본은 신식무기와 훈련받은 병사들을 조선에 파병함.


14. 하루에 500여차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관군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번번히 패함.
(유명한 우금치 전투 패배후 우금치 계곡과 봉황산 마루에는 농민군들의 시체와 핏물이 넘쳤다고 함.)

15. 동학농민군의 힘을 알았던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전체를 학살하기로 함.
(당시 전보 : "동학당에 대한 조치는 엄렬함을 요하니 모조리 살육해야 한다!")

16. 이로부터 1년후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함.

17. 이때 심지어 조선 관군 마저도 일군군 편이었음.
('민보군'과 동학농민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보부상'등이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섬.)

18.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난 농민군들인데,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구별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함.

19. 일본군은 포로로 잡힌 동학농민군을 짚으로 얼굴부터 태워죽이고, 농민군이 다른 농민군을 작두로 목을 잘라 죽이게 만듬.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는지 당시 토벌군에 참여했던 한 일본군 장교는 훗날 정신병에 걸려 자살했다고 함.)

20. 1894년 순창에서 잡히 전봉준은 이듬해 1895년 처형을 당함.

21. 또 다른 지도부 김개남 (강경파) 은 서울로 압송되기 전 화가난 양반들에게 처형됨.
(능지처참 당하여 시체를 사방에 뿌려서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함.)

22.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은 역적으로 낙인 찍혀 족보를 바꾸고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됨.

23. 이후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조병갑은 훗날 복직이 되어 판사가 됨.

24. 그리고 1898년,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을 판결함.


저때나 지금이나 다른게 하나도 없네요...
가슴이 먹먹해져 오네요...
이 얼마나 가슴아프고 억울한 역사 입니까...
오죽하면 프로그램 마지막에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눈물을 훌쩍이네요...


역사저널 그날 <동학농민운동>

역사저널 그날

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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